1876년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조선은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외국 군대는 조선을 밥 먹듯 드나들게 된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을 독점하게 되고, 급기야 1905년의 을사늑약 등을 거쳐 기어이 1910년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함으로써 한국(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시대적 상황은 이토록 암울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자유와 해방, 민족국가의 회복을 갈구하며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래의 내용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쓴 이름 없는 민중들과 애국 선열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이 만든 각종 독립 단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3·1 운동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있고 나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무장 독립 전쟁을 벌이는 것이 독립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하였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국내와 가까운 대신에 일본의 통제가 직접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20년대에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음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울림으로써 만주 무장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대규모 군대를 만주에 파병하였다. 이에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천주교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청산리대첩, 1920).
청산리 대첩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간도참변).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밀산부로 이동하여 서일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러시아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에서 독립군 부대 간의 지휘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이후 남은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統義府, 혹은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1922). 통의부는 서간도 최초의 통합 독립군 단체인 통군부를 확대하여 결성한 것으로 서간도 교육, 산업 및 지역 자치활동과 행정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다시 분열되어 의군부, 참의부(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등으로 조직이 나눠졌다. 이들은 미쓰야 협정(1925)으로 해체되었으나 이후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재편되었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으며, 북만주의 혁신 의회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이후 1930년대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주도한다.
│주도권을 득점한 듯한 독립군들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1. 간도 참변(경신 참변, 1920. 10.)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한인 마을 습격 → 한인촌의 동포 무차별 학살, 집과 학교 등 방화·약탈·파괴
2. 독립군의 이동
청산리 대첩 이후 북만주의 밀산에 독립군 집결, 서일을 총재로 대한 독립군단 결성 → 소련 영토로 이동
3. 자유시 참변(1921)
대한 독립군단의 소련령 자유시(스보보드니) 이동 → 독립군의 통합 과정에서 부대 편성과 지휘권을 둘러싸고 분쟁 발생 → 소련 적군이 무력으로 무장 해제 단행, 수백 명의 독립군 희생
4. 미쓰야 협정(1925)
일제가 독립군 탄압을 위해 만주 군벌과 협정 체결 → 독립군 활동 위축
1920년대까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지 못한 삼부는 1930년대까지 정부 역할을 해가며 독립을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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